[단독/사건&내러티브]“나 못믿어요?” 거액 찾겠다는 문신男… 농협 왕언니 눈이 반짝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이틀 연속, 보름 뒤 또…
남다른 感으로 보이스피싱 3건 막아 “보복 받을까 겁나지만 제 일인걸요”

“아줌마, 나 못 믿어요?”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아 팔의 문신을 내보였다.

지난달 26일 경기 광명시 철산로 농협은행 광명시지부. 모자를 눌러 쓰고 팔에 문신을 한 20대 중반 남성은 자신의 계좌에서 6000만 원을 현금으로 찾으려는 중이었다.

창구에서 남자를 상대하고 있던 이모 농협 창구거래팀장은 고민에 빠졌다. 통장 주인이 자신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건 문제될 게 없지만 마음 한구석의 껄끄러운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 팀장에게는 3월 11, 12일에 이틀 연속 ‘몸캠사기’ 조직과 보이스피싱 조직을 찾아 경찰에 넘긴 적이 있었다. 이 팀장의 ‘촉’은 문신한 남자를 앞에 두고 다시 꿈틀댔다.

○ 이틀 연속 금융사기범 가려내

보름 전이었던 지난달 11일 농협은행 광명시지부 정문으로 밤색 점퍼를 입은 50대 남성이 들어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현금으로 뽑으려고요.”

거래 명세를 조회하니 남자의 계좌에 4400만 원이 입금돼 있었다. 이 거액이 입금되기 전까지 잔액이 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던 통장이었다.

“사업자금으로 사용하시려고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이 팀장은 옆 창구에 있던 직원에게 귀엣말로 지원을 요청했다. “거래 내용이 이상한데, 혹시 지점 주변에 수상한 사람 있는지 좀 둘러봐 주실래요?” 해당 직원은 지점 앞 대로에 짙게 선팅한 검은색 승합차가 시동을 켠 채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팀장은 곧장 지점장에게 이를 보고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정상적인 거래 고객을 금융사기범으로 몰았을 때 올 후폭풍이 두려웠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돈이 범죄조직에 흘러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오자 승합차는 도주했고 지점에 남아 있던 50대 남성은 경찰에 붙잡혔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자신의 통장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빌려주고 돈을 대신 찾아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의 수수료를 받는 보이스피싱 인출책이었다. 이 남자는 이미 인근 A은행에서 5500만 원, B은행에서 5100만 원을 찾아 조직에 넘긴 상태였다.

이 팀장은 다음 날인 12일에도 다른 보이스피싱 조직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날 지점을 살피다 두 남성이 현관에서 가까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두 대를 차지하고는 현금카드를 바꿔가며 5만 원권을 인출하는 모습을 봤다.

“보통 고객들은 1만 원짜리 다섯 장을 찾아도 꼭 세어보고 지갑에 넣어요. 그런데 그 남자들은 돈을 ATM에서 찾자마자 바로 가방에 쑤셔 넣더라고요.”

마침 지점에는 전날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나와 있었다. 이 팀장은 형사들에게 이런 사실을 신고했고 형사들은 이 남성들을 붙잡았다. 남성들의 가방에서는 현금카드 25장과 5만 원권 약 4000만 원이 발견됐다. 이들 역시 보이스피싱을 통해 일반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조직원들이었다.

○ “겁나지만 고객 돈 지키는 게 중요”

지난달 26일에도 이 팀장은 보이스피싱 인출책을 붙잡아 경찰에 신고했다.

“한 번에 6000만 원을 찾으러 왔는데 돈을 누가 보냈는지 슬쩍 물어도 대답을 못 하더군요. 괜히 문신을 보여주고 언성을 높이길래 수상쩍다 싶었죠.”

이 팀장의 가족들은 최근 이 팀장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보름 새 보이스피싱 조직을 3개나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보복을 받을지 몰라서다.

“은행 직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이 한 푼 두 푼 모은 소중한 돈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겁은 나지만 어쩔 수 있나요. 전 은행원인데요.”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