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고미석]세계최빈국 톤즈에 3만5000그루 생명의 망고 심어준 ‘마마李’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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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사단법인 ‘희망고’ 대표

2009년 11월 공식 출범한 사단법인 ‘희망고’의 이광희 대표는 “희망고는 모든 후원자 덕분에 존재하는데 내가 대표라는 이유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이 있으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버티는 힘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희망고를 통해 남수단 톤즈에 3만5000그루의 망고나무를 심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2009년 11월 공식 출범한 사단법인 ‘희망고’의 이광희 대표는 “희망고는 모든 후원자 덕분에 존재하는데 내가 대표라는 이유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이 있으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버티는 힘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희망고를 통해 남수단 톤즈에 3만5000그루의 망고나무를 심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아프리카에서 망고나무는 우리나라의 마을 어귀 느티나무와 비슷하다.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배경으로 익숙한 남수단의 톤즈. 그곳 사람들에게 망고나무는 식량이자 재산이며, 단순한 나무 이상의 귀한 삶의 터전이다. 오랜 내전으로 찢긴 땅을 망고나무 숲으로 바꿔가는 한국 비정부기구(NGO)가 있다. 2009년 설립된 사단법인 희망고(희망의 망고나무). 지금까지 3만5000그루의 묘목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열악하다’는 말조차 사치인 곳

황량한 톤즈에 나무 심기와 구호 활동을 뿌리내린 주역은 희망고를 창립한 이광희 대표(63·패션디자이너). 식목일을 앞두고 1일 서울 남산 자락 이광희부티크에서 그를 만났다. 현지인들이 친근감의 표시로 부르는 ‘마마리(Mama+Lee)’, 이 대표는 심한 감기에 걸려 대화 내내 기침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망고나무 얘기만 나오면 눈빛을 반짝였다.

―왜 망고나무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망고는 헐벗은 대지에서도 잘 자라는 기특한 생명의 나무다. 재산가치가 있어 몇 그루만 가져도 온 가족이 굶지 않고 자식들도 키울 수 있다. 2009년 월드비전 봉사에 나선 김혜자 선생님을 따라 톤즈에 처음 갔는데 열악하다는 표현 자체가 사치스럽게 다가왔다. 시장에서 먹을 것이라고 유일하게 파는 망고 몇 알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됐다. 망고는 1년에 두 번 수확한다. 높은 열량과 풍부한 영양을 가진 열매여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건기에 배고픔을 덜어준다. 열매를 맺기까지 대략 7년이 걸리는데 한번 심으면 100년을 거뜬히 버틴다. 그때 여비를 몽땅 털어 100그루의 묘목을 심은 것이 오늘 3만5000그루로 불어났다.”

주정부 “농장 10만평 맡아달라”

너무도 처참한 현실 앞에서 다시는 톤즈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일회성 기부로 생각한 나무 심기는 ‘희망고’를 만든 뒤 장기 프로젝트가 됐다. 망고 한 그루 심는 데 3만 원, 기금 마련 패션쇼와 바자회 등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케냐 나이로비로, 남수단 수도 주바로, 다시 톤즈로 찾아가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리는 험한 여정. 풍토병 예방주사와 불편한 숙식에도 그는 1년에 한두 번 톤즈를 찾아가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활력을 얻는다.

남수단 정부는 2011년 국제 NGO 인증과 함께 희망고에 1만 평의 땅을 맡겼다. 그 땅에 묘목장을 만든 뒤 톤즈 사람들이 망고만 바라보며 살지 않도록 복합교육문화센터 희망고 빌리지를 세웠다.

“2월에 톤즈를 다녀왔다. 작년엔 무릎을 다쳐 못 갔고 이번엔 준비하고 오가는 시간까지 회사 일을 거의 한 달 정도 빼먹었다. 그래도 바늘과 실조차 없던 동네에서 재봉학교 첫 졸업생 10명이 배출된 것을 보며 행복했다. 현지 인프라가 없어 케냐와 우간다에서 교사를 모셔왔는데 앞으로는 졸업생이 교사가 되거나 재봉틀로 돈도 벌 수 있게 됐다.”

세계 최빈국 남수단, 그중에서도 톤즈는 국제 구호단체들의 총집결지다. 규모 면에서 희망고는 명함도 못 내밀 처지이건만 현지 밀착형 접근방식으로 주목받는다. 유치원 아이들을 위해 목공기술을 배운 아빠들이 책걸상을, 재봉기술을 배운 엄마들이 교복을 만들어줬다. 이번 방문에선 남수단 최대 일간지가 전면 인터뷰로 그를 소개했고, 톤즈 관할 주정부의 지사는 영국 식민지 시절 만든 10만 평 규모의 망고농장을 희망고에 맡겼다.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그만한 농장을 만들려면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 시간을 앞당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생겼다. 앞으로 망고 가공공장도 만들고 인력양성센터도 만들고….”

남수단 톤즈에 세운 복합교육문화센터 ‘희망고 빌리지’에서 재봉교육을 돕고 있는 이광희 대표. 사단법인 희망고 제공
남수단 톤즈에 세운 복합교육문화센터 ‘희망고 빌리지’에서 재봉교육을 돕고 있는 이광희 대표. 사단법인 희망고 제공
자선단체 한번 왔다 가면 함흥차사

‘마마리’는 무슨 일을 하거나 아프리카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가령, 자선단체가 학교 건물만 달랑 지어놓고 가면 몇 해 못 가 폐허로 변한다.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현지인 중심으로 운영하고 관리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아프리카는 원조를 받는 게 많아 도움받는 데 익숙하다. 한번 원조 해준 사람들이 다신 안 오는 데도 이력이 난 것 같다. 하지만 평생토록 남의 도움만 받고 살 순 없지 않은가. 자립 기반을 만들려면 항상 현지인의 의견이 먼저다. 자선이란 이름으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현지에서 절실히 원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확인해 가면서 차근차근 일하는 게 우리 목표다. 지금 희망고 빌리지에는 엄마들을 위한 재봉교육교실, 아빠들을 위한 목공훈련센터, 어른들이 공부할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유치원이 마련돼 있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 초등학교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크면 중학교를 열 계획이다.”

올 2월 그는 한센병 환자촌을 찾은 것을 가장 큰 수확으로 꼽는다. 그곳은 피폐한 톤즈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그늘진 동네였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찾아가 가장 소외된 사람을 돕는 것이 희망고의 모토다. 한센병 마을을 가니 팔다리도 없이 구걸로 연명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아, 이분들이 바로 희망고 몫이구나 생각했다. 환자 명단을 확인하고 준비한 구호물품을 나눠준 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떠나려는데 얼굴 전체가 뭉개진 남자가 차로 다가왔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창문을 반쯤 올렸다. 한데 열린 틈으로 그가 손을 들이밀고 뭐라도 달라 하는데 줄 게 없었다. 허탕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숙소로 돌아오니 잠은 안 오고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나는 거다. 마음 아팠고 스스로를 반성했다. 톤즈에서 가장 소외받는 이들을 돌보려고 왔지만 그는 한센병 마을에서도 소외된 사람이었다. 다음 날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네로 돌아가 가까스로 그의 움막을 찾아냈다, 다시 만나 보니 반갑기만 했다. 한 사람당 밀가루 한 포대를 배분했는데 그분께 4포대를 전달했다. 희망고가 이 사람을 챙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마을에서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투입한 기금은 얼마 정도인가.

“기부금이나 회원수로 따지면 구멍가게급도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선 숫자로 얘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보통 아프리카에서 일하면 굉장히 슬플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즐겁게 일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현지인 앞에선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불쌍하다’는 값싼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면 다 똑같지, 내가 강자라고 생각한 적 없다. 우는 것은 내 감정이지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가혹한 환경에서도 의연하게 견디고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주민들을 보면 훨씬 여유로운 환경에서도 각박하게 사는 우리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묘목 배분 같은 희망고 행사가 열리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의 축제다. 혹여 식사가 늦어져도 목소리 높이는 사람이 없다. 다들 춤추고 노래하며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특히 처음 톤즈 방문에서 만난 어린 소년을 잊지 못한다. 물이 거의 마른 강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 집으로 의기양양 돌아가던 말라깽이 소년. 장난삼아 던진 “그거 나 줄래”란 말에 선뜻 나에게 생선을 내밀었다. 내가 가진 전부를 내주는 그 마음은 아낌없이 베푸는 망고나무와 닮은꼴이었다.

톤즈 사람들 앞에선 절대 울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관심 어린 손길을 가르쳐준 것은 부모님이셨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1953년 땅끝마을 해남으로 내려가 전쟁고아들과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 남편을 묵묵히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삶은 지금도 눈물 없이는 떠올리지 못한다. “부모님은 그 당시 저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 일했는데…힘든 고비들을 어려운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요즘은 착한 일을 해도 칭찬 대신 가식적 선행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상관없다. 어디서나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은 있는 거니까. 어차피 일에 바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바깥에서 뭐라 하는지 알지 못한다.(웃음)”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뭐든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그가 들려준 나눔의 철학은 소박했다. 거대 담론이나 콧날 시큰한 극적 드라마가 없는 대신 괴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톤즈의 척박한 현실 앞에서 눈물 대신 행동을 선택한 사람. 그는 흙먼지 날리던 황량한 땅에 황금빛 망고 열매들이 주렁주렁 물결치는 그날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 이광희 디자이너는… ▼

이광희 대표는 이화여대 비서학과 졸업 후 국제패션연구원을 수료하고 1985년 이광희부티크를 열었다. 1987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주인공 원미경이 그가 디자인한 공주 같은 옷을 입으면서 당시 ‘이광희 패션’이 장안의 화제였다. 이희호, 김윤옥 여사를 비롯해 재벌가 안주인과 고관대작 부인들이 그가 만든 옷을 입었다.

하도 유명세를 치르다 보니 1999년 정재계 고관 부인들의 ‘옷로비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 일간지에서 마치 그가 연루된 듯 추측성 기사를 썼다가 혼쭐이 났다.

“저 굉장히 용감하다. 문 닫을 각오하고 신문사 사회부장을 만나러 갔다. 나는 일은 일로만 대할 뿐 개인적으로 손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옷 선물도, 상류층 자제의 중매도 해준 적이 없다. 자존심을 걸고 지금까지 이미지를 지켜왔는데… 사과를 받아냈다.”

대한민국 최상위 계층부터 세계 최빈국의 가장 소외된 사람들까지 넘나드는 인간관계,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한 매너를 가진 ‘천생 여자’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뚝심의 NGO 리더십의 ‘천하의 상머슴’을 오가는 정체성. 패션디자이너로 출발해 국제 구호단체 대표로 활동하는 이 대표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 스펙트럼의 주인공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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